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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피제 신부님
글쓴이 : 띤꾸 날짜 : 2011-07-26 (화) 18:13 조회 : 1156
마음수련 만남> 맥그린치 신부 (월간 마음수련)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 Patrick James Mcglinchey 신부 1928년 남아일랜드 레터켄에서 출생했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4년 제주도 한림공소로 부임한 이후 지금까지 50여 년 동안 축산업 등 여러 가지 사업을 벌여 제주도민의 자립을 위해 헌신해 왔다. 그 공로로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훈장, 내무부 장관상, 적십자 봉사상 등을 수상했고, 1973년 제주도 명예도민증을 받아 ‘임피제’라는 이름의 한국인이 되었다.

 

 

인터뷰 김문옥, 사진 김혜균

제주시에서 서부관광도로를 타고 올라가다 중산간 지대로 들어서자 드넓은 초지가 펼쳐진다. 택시기사에게 이시돌 목장에서 내려달라고 하니 이게 다 목장이란다. 자동차로 아무리 달려도 끝없이 펼쳐진 초지 위에 한 무리의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또 한참을 지나서는 방목 중인 한 떼의 얼룩소들이 보인다. 그 많은 소들이 맘껏 먹어도 벌판에는 먹을 것이 지천이다. 50여 년 전, 이곳은 제주도에서 제일 쓸모없는 땅, 풀도 잘 자라지 않는 돌밭이었다고 한다. 그 황무지를 이렇게 풍요로운 초지로 바꿔 놓은 이는 한 젊은 아일랜드 청년이었다. 가톨릭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으로 25세 푸른 나이에 전쟁 중이었던 한국에 파견된 맥그린치, 한국 이름 임피제 신부다.

한국 올 땐 한달 만에 죽을 줄 알았죠
임피제 신부를 만나기로 한 날, 초봄의 햇살이 눈부신데 바람은 몹시 매서웠다. 바람 많다는 제주에서도 중산간 높은 지대에는 더 많은 바람이 분다. 금악성당은 목장 한 끝에 숨은 듯 아담하게 앉아 있었다. 작지만 정갈하고 아늑하다. 오후 3시. 햇볕만 가득한 조용한 성당의 제단에 꽃꽂이를 하고 있던 수녀님 한 분이 그에게 기별을 해주었다. 잠시 후 약간 굽은 어깨에 커다란 체구를 가진 노신부가 걸어 나온다. 제주도에서 56년을 보낸 그는 올해 82세. 걸음은 느릿했지만 얼굴은 맑았고, 외국인의 억양이 아직 남아 천천히 이어지는 목소리엔 힘이 있었다.

“1951년 12월에 신부 서품 받았지요. 우리 동창들은 중국, 일본, 필리핀에 가고 나는 한국으로 발령받았어요. 한국 전쟁 중이었죠. 그때 아일랜드 살 때 텔레비가 없어서 신문하고 라디오 들으면 매일 코리아에서 몇 사람 죽었다, 이런 기사뿐이었어요. 겁났죠. 도착하고 한 달 만에 다 죽을 줄 알았어요.”

죽을 줄 알았는데도 왔다는 말이다. “그래도 뭐, 죽지 않았잖습니까?” 하면서 웃는다. 아일랜드에서 뉴욕으로,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그리고 요코하마를 거쳐 20여 일간의 여정 끝에 피난민으로 들끓던 부산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53년 4월. 목포와 순천 교구를 거쳐 이듬해 제주도 한림공소로 부임한다.

“그때 제주도 4.3사건으로 3만 명 이상 죽었어요. 제주 인구가 27만 명이었는데, 그중에서 3만 명이 죽었으니까 사람 안 죽은 집이 없었어요. 아주 힘들었어요. 아주 빈곤했어요. 신자도 없었죠. 25명이니까. 성당도 없고 사제관도 없었어요. 전부 초가집밖에 없었죠.” 헐벗은 그들에게 구호물자를 나누어주었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님을 알았다.

청년 신부는 어떻게 하면 이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을까 그 생각에 골몰했다. 그리고 반세기 넘는 세월을 이곳에 머물며 그가 이루어놓은 것은 전후 제주도 경제발전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당을 짓는 것을 시작으로 수직물회사를 만들어 도민들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4H클럽을 만들어 젊은이들을 교육시켰다.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어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양과 돼지 사육으로 시작된 성이시돌 목장은 제주 축산업의 기초가 되었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하고 우유공장, 치즈공장, 배합사료공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 요양원, 병원, 호스피스복지원, 젊음의 집, 어린이집, 유치원 등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가난해도 남 돕는 제주 사람들
“내가 한 거 아니고 하느님한테 맡겼어요. 그리고 제주 사람들, 아주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섬사람들 아주 독립성 있어요. 빈곤 중에 살면서도 나에게 먹을 거 줬어요. 닭도 주고 계란도 주고. 그리고 해녀들, 그분들 아주 힘들었어요. 돈 없었지만 일을 해줬어요. 신자 아닌 사람도 일 해주었어요. 나무, 돌 운반해주고, 바닷가에서 모래도 운반해주고. 그래서 성당을 지을 수 있었죠.”

아무것도 없다 생각되었던 이곳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한결같은 믿음으로, 전쟁이 지나간 자리, 삶의 모든 기반이 무너지고 타인에 대한 신뢰뿐 아니라 자신에 대한 신뢰마저 잃어버린 황폐한 이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그의 젊음을, 그의 일생을 헌신했다.

“제일 많이 들은 말이 ‘안됩니다’였어요. 한 오 년 동안 그 말만 들었어요. 주로 하는 말이 일본 사람 해봤다고, 일본 사람 실패했으니까 안된다고 자꾸 그 말만 했죠.” 양을 키워 양털로 옷감을 짜는 수직물공장을 만들 때도, 신용협동조합을 세울 때도, 목장을 시작할 때도 사람들은 모두 안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앞장서 직접 발로 뛰며 하나씩 이루어 갔다. 서투르게 짜서 울룩불룩한 털양말을 서울로 가져와서 직접 팔러 다녔고, 아일랜드의 가족에게, 세계의 구호단체에 편지를 써서 기금을 모았다. 물이 없어 목장은 안된다고 했던 중산간 지대에 일본군이 쓰던 막사를 축사로 개조해 돼지와 양을 들이고, 화산재로 물이 고이지 않는 땅에 찰흙을 깔아 저수지를 만들었다.

돌밭을 골라내어 품질 좋은 목초 씨앗을 뿌리고, 저수지 물이 부족해지자 18킬로미터에 이르는 파이프를 묻어 수원지로부터 물을 끌어왔다. 그의 정성과 헌신 앞에 사람들은 점점 하나의 힘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성직자의 사명을 띤 그였지만, 그렇더라도 평생을 가족과 고향을 떠나 살면서 그리움은 없었을까. “여기 우리 고향하고 아주 비슷합니다.

아일랜드도 바람도 많고 돌담도 많고 초가집도 거의 똑같은 게 있어요. 결혼식 장례식 풍습도 비슷해요. 우리 아버지는 수의사예요. 형님도 수의사고. 나는 아일랜드 농촌에 살면서 학교 가기 전에 아침에 젖소 젖 짜고, 또 갔다 와서도 젖 짜고 했어요. 또 집에서 돼지도 길렀죠. 그런데 여기 와보니까 소 기르는 방법, 돼지 기르는 방법 보니까 아주 잘 못하고 있었어요. 제주 사람들 농사일은 아주 잘해요. 보리 농사, 고구마 농사는 아주 잘 알아요. 단, 축산업은 아주 잘 못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이렇게 하면 어떨까 제안했어요. 돼지 소 이렇게 키우면 소득 증대시킬 수 있다 아무리 말해도 할아버지들이 반대했죠.”

고향에 대한 추억으로 시작된 그의 이야기는 어느새 다시 제주도로 돌아와 있다. 문득 궁금해진다. 그는 가톨릭 선교사이다. 선교의 기본 목적은 종교를 전파하는 것일 텐데,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는 자신의 종교를 전파하는 것보다 가난 구제 사업에 더 힘을 쓴 것 같다.

사람 만날 때 종교 뭐냐 물어본 적 없어요
“종교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랑입니다. 하느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할 줄 알아야죠. 나는 예수님 믿어라 이런 얘기 안 합니다. 이때까지 사람 만나서 종교 뭐냐 물어본 적 한 번도 없어요. 나로서는 가톨릭교도로서 의무가 있어요. 하느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두 가지 계명이죠.

나는 그 의무가 있으니 내가 나가서 일해야죠. 그런데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나 너 도와주니 믿어야 한다, 그거 안 되죠. 우리 절대 그렇게 안 합니다. 그냥,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 실천하는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며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사랑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은 교만 때문이라고 했다. 남을 배려하지 못하고 이기적인 것은 교만 때문이며, 교만은 뿌리 뽑아야 할 전염병과 같은 악습이라고 했다. “진짜 종교인은 아주 겸손합니다. 자기 자신이 죄인인 줄 알죠. 머리 숙여 하느님 원하시는 대로 살기 원합니다. 하느님 원하시는 거 뭐냐, 사랑하는 거.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자신을 떠날 수 있는 사람. 자신을 떠나서 희생하는 사람. 그런 인간은 하느님을 많이 닮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입니다.” 진정한 선교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종교를 전파하기 이전에, 내 것만 옳다고 주장하며 남의 것을 배타시하기 이전에, 그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믿는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해 가는 것인가 보다. 자신이 믿는 하느님 닮은 삶을 스스로 살아가는 것인가 보다.

맥그린치 신부의 삶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현재 우리 이시돌에서 돈 버는 거 두 가지예요. 목장하고, 사료공장. 그 이익금은 전부 요양원이나 호스피스복지원에 들어갑니다. 우리 요양원하고 호스피스복지원 들어오는 사람은 제일 가난한 사람들, 돈 낼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거 운영하기 위해서는 돈 벌어야죠.” 그의 안내로 이시돌 목장 내의 요양원과 호스피스복지원을 둘러보았다.

요양원의 환경은 넓고 쾌적했다. 복도를 오가는 어르신들의 표정은 모두 밝아보였다. 수용 인원은 90명 정도이고 세 분의 수녀와 일반 직원 50명이 근무한다. 종교와 상관없이 채용하는데, 다른 직장보다 급여가 낮은데도 이직률이 전혀 없다고 한다. 그가 들어서자 요양원의 어르신들이 함빡 웃음을 지으며 기구에 의지하고 있던 불편한 몸을 일으켜 반갑게 손을 내민다.

그는 일일이 그 손을 잡아주며 인사를 했다. 티 없이 웃는 주름진 그 얼굴들이 따뜻하고 해맑아 보였다. 29개 병상을 운영하는 호스피스복지원은 병원이 없던 시절 한림읍에서 복지의원으로 35년간 운영하다가 주변에 다른 병원들이 많이 생기자 호스피스 전문 병원으로 바꾸어 4년 전 목장 안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한국에 복지사업법상 호스피스라는 거 없어요. 한국에 호스피스 많이 필요하거든요. 특히 농촌에서 암 병 걸리면 집에서 환자 봐줄 사람이 없어요. 가족은 다 밭에서 일해야죠.

하루 종일 봐줄 사람 없잖아요. 그리고 몰핀 같은 약 살 돈도 없죠. 아주 불쌍해요. 여기 와서 많이 봤어요. 물론 큰 병원에 호스피스 몇 개 있지만 돈 있는 사람이 가고. 그건 진짜 의미의 호스피스 아니거든요. 호스피스의 진정한 개념 아직 한국에 없어요. 여기 이시돌이 처음일 겁니다. 한국에 많이 필요합니다.”

가난한 이 위한 사회적 기업에 관심 가져주었으면
그는 스크랩한 신문기사 한 조각을 꺼내 보여주었다. 미국 유명 경영대학원과 정부 산하 연구기관이 ‘사회적 기업의 역할을 통한 경제 위기 극복’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는 내용이다. ‘사회적 기업’이란 주주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자리 창출과 사회복지 확대 등 사회적 책임의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체를 말하는데, 1970년대 유럽에 처음 등장했고 우리나라에서는 90년대 말부터 논의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 아이디어를 오래전부터 실행해왔어요.

 



 

 

이거 아주 중요합니다. 사회를 위한 기업. 목적은 두 가지예요. 일자리 만들어주고 복지사업에 이바지하는 거. 우리는 작은 사업이지만 꼭 그 아이디어 실천해왔어요. 여기뿐 아니라 이런 사업, 전국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회사들, 특히 중소기업들, 돈 벌면서 불쌍한 사람들 돕는 일, 사회적인 일 하는 사람들을 정부에서 지원해줘야 돼요.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더 많아져야 해요.”

푸르던 청년은 이제 백발의 노인이 되었지만 젊은 날의 순수한 열정만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듯했다. 그의 한국 사랑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어쩌면 파란 눈의 이 한국인이 한국인보다 더 열정적으로 한국을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로서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거죠.

또 이런 잡지 통해서 이야기 하고요. 지금 위기가 있잖아요. 직장 수십만 없어지고 기업 부도나고. 이 문제 이렇게 하면 된다, 전부 다 같이 힘을 모아가지고. 정부와 재벌들이 먼저 앞장서야 해요. 그러면 나머지 사천오백만 우리나라 사람들 옆에서 구경만 하겠습니까? 한국 사람들 잘하잖아요. 캔 두. 힘을 모아야죠. 그리고 그 힘이 있다는 거 인정하도록 해야죠. 서로 도와주고 사랑하는 마음, 할 수 있다는 마음, 이게 자원이에요.”

 

 

월간 마음수련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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